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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3] by Kircheis

서구 유럽의 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15세기 말엽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재창된 지동설, 즉 태양중심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물론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물리 이론은 확실한 하나의 획을 그은 발견이지만,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지동설과 진화론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과학의 나아갈 바를 알려줬다고 봐야할 것이다.

지동설은 당시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천동설에 반하는 이론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당시 서구의 중심 사상은 성서를 진리로 여겨, 그 진리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들은 악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특히나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마녀사냥을 자행하던 시대가 이 15세기이다.
이런 시대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혁신적인 수준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관찰한 천문의 운동을 기록한 저술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했지만,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에 오르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동설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천체의 운동 법칙을 발견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 지동설과 관련한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고, 결국 그의 연구는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이른다. 갈릴레오는 결국 교황청의 호출을 받아 종교재판정에 끌려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가택연금을 받게 된다. 이 재판정에서 나오면서 갈릴레오가 한 말은 유명하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당시 유럽은 로마카톨릭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대였다. 물론 이로부터 3~400년 전의 십자군 원정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당시의 로마카톨릭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교황청은 주교들에게 '대사권'을 주었으며, 이 대사권은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면죄부'라는 형식으로 왜곡되어 돈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앙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귀족도 아니요, 돈도 없는 일반 민중들은 면죄부를 살 수 있는 경제력이 되지 않는 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내세란 현재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릴 뿐인 희망없는 미래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로마카톨릭의 위세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1400년대 말에서 1500년대에 이르는 이 시기에 마틴루터나 존 칼뱅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에게 내세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것도 이 시기였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것을 기점으로 로마가 지중해 연안의 세계를 재패하면서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에 퍼지는 계기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또 로마카톨릭이라는 변질된 종교로 인해 세상에 십자군 전쟁이나, 면죄부판매같은 잘못된 역사를 만든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1500년을 전후로 일어난 일부 과학자들의 진리에 대한 도전과 종교개혁을 통한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짜 맞춘 시나리오처럼 시대의 변이를 몰고온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로마카톨릭에 있어서 세상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우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상의 모든 생물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이 당시 사회 저변에 깔려있었던 천동설과 창조론이었다. 이런 시대에 발표된 지동설은 그 하나의 축이 되는 천동설 곧 성서에 기록된 대로 신이 세상을 만들 당시에 정한 절대 불변의 진리가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들의 권력을 합리화시켜왔던 교황청으로서는 이러한 지동설의 전파는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이 진화론이다.
지동설의 경우 과학이 날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주의 운동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이루어 지면서 이제는 완전한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천체물리학 등을 통해 우주의 태동과 성장에 대한 다양한 방향으로의 연구와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반면 진화론의 경우에는 창조론과 함께 언급되어지고 있는 조금 복잡한 상황의 전개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다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윈의 집안은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자로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다. 의사인 부친의 지도아래 성장하면서 박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부친의 기대대로 의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박물학을 시작으로 자연신학을 배운 것이 그의 안에서 진화론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다윈의 안에서 진화에 대한 체계가 잡힌 것은 비글호를 탑승하면서 부터 였다고 볼 수 있다. 비글호를 타고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접한 다양한 생물들과 이후 배우게 된 지질학, 직접 접한 자연과 화석으로 남은 고대동물 등 다양한 접촉을 통해 그의 속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학설이 자라나게 된다.
사실 비글호를 탑승한 5년간은 진화론에 대한 이론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접한 다양한 생물과 화석들을 바탕으로 진화론을 구성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약 20년 후의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진화론을 재창하게 된 이론적 배경에는 그가 배운 박물학과 비글호를 통한 다양한 경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비글호를 타면서 다양한 동물들과 화석을 접했고, 비글호를 내려서 자신이 접한 것들을 발표할 당시 다윈은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또한, 발견하고 확인한 동물들에 대한 계통분류는 점차 그의 안에서 진화론의 뼈대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도 생물학에서 동물의 계통 분류는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이다. 물론 다윈의 이론은 분류학보다는 분지학에 기반한 계통학적 분류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어쨌든 1859년 다윈은 결국 '종의 기원'을 발표하고 만다. 종의 기원에는 그가 직접 보고 느낀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자연 선택설'을 하나의 이론으로  내놓는다. '종의 기원'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사회에서 절대 진리로 믿어지던 창조론에 대한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영국 런던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으며, 여기서 헉슬리는 비도덕적인 인간 조상보다는 도덕적인 원숭이를 조상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도덕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는 원숭이에게 도덕적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인데, 그런 원숭이를 조상으로 삼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헉슬리는 실증된 과학에 대한 엄청난 신봉자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헉슬리의 말보다는 원숭이 몸이 입혀진 다윈의 얼굴이 그려진 삽화가 더 잘 알려져 있다.

진화론은 이후 계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미 많은 나라들에서 생물학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진화론을 처음 주창한 사람은 다윈이 아니다. 시작을 찾고 싶다면 '부폰'이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등을 먼저 찾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는 진화론 자체보다는 창조론과의 차이점을 짚고자 한다.

지동설에 이어서 진화론의 발전은 성경을 진리라 믿는 기독교계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한 물리학 분야와의 조화로 진화론은 이제 당연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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